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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관리자
제목 : 일본역사기행(44) - 바쿠후의 쇠퇴 [2005/05/25]



































위쪽 왼쪽부터  이에노부, 요시무네, 이에나리, 이에요시


바쿠후의 쇠퇴

초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3대 쇼군 이에미쓰까지의 바쿠후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강압 정치를 했기 때문에 이를 무단 정치라고 하며, 4대 쇼군 이에쓰나(家綱) 이후를 문치 정치라고 한다. 특히 도쿠가와 바쿠후 최고의 명군이라 불리는 6대 쇼군 이에노부(家宣)는 아라이 하쿠세키(新井白石)을 등용하여 이른바 쇼토쿠(正德)의 치(治)를 편 것으로 유명하다. 또 8대 쇼군 요시무네(吉宗)는 교호(亨保)의 개혁을 실시하는 등 바쿠후의 중흥에 힘쓴 명군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에노부와 요시무네 이후 바쿠후의 통치는 급속히 불안해져 갔는데 그 이유는 바쿠후의 재정 궁핍, 문치 정치가 계속되는 데 따른 사무라이들의 지위 약화와 이에 따른 불만, 상인들의 대두로 인한 경제 생활의 변화, 몇 번에 걸친 대기근으로 인한 농민 생활의 파탄 등이었다. 특히 1732년의 교호(亨保) 기근, 1786년의 덴메이(天明) 기근, 1832-36년의 덴포
(天保) 기근 때에는 굶어 죽은 이의 수가 수십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 때문에 굶주림에 견디다 못한 농민들의 반란이 각지에서 끊이지 않게 되고 바쿠후의 권위는 추락할 대로 하였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바쿠후에서도 개혁을 추진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흔히 에도 후기의 3대 개혁이라고 하는 교호 개혁, 간세이 개혁, 덴포 개혁이 바로 그것이다. 교호(亨保)의 개혁은 8대 쇼군 요시무네에 의해 추진되었는데, 요시무네는 이라이 하쿠세키의 유교적 이상 정치가 바쿠후 통치의 혼란을 가져왔다고 판단하여 무사의 권위를 다시 강화하고,
전답의 개간과 산업을 발달을 추진함으로써 바쿠후의 재정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요시무네의 개혁으로 바쿠후는 일시 안정을 되찾는 듯하였다. 그러나 이후 교보 기근과 덴메이 기근 등이 연이어 발생함에 따라 농민들의 생활은 궁핍의 극한에 이르렀고 무사 지배의 사회 질서는 그 근본에서부터 흔들리게 되었다. 이에 11대 쇼군 이에나리(家)는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를 등용하여 간세이(寬政)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 개혁의 핵심은 피폐해진 농촌을 되살리기 위하여 상인들의 활동을 억제하고 다시 농본주의로 복귀하고자 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복고적 개혁은 상업과 화폐 경제의 진전이라는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사다노부가 은퇴한 이후 친정에 나선 이에나리가 무분별한 지출을 일삼는 통에 바쿠후의 재정은 더욱 파탄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연속되는 기근은 당연히 곳곳에서 농민들의 잇키(一揆)를 불러 일으켰는데, 특히 1837년 무사이자 양명학자였던 오시오 헤이하치로(大鹽平八郞)가 주도한 오시오의 난은 무사가 농민 잇키를 주도했다는 점에서 바쿠후에 일대 충격을 주었다. 1841년 오고쇼로 있던 이에나리가 죽자 12대 쇼군 이에요시(家慶)는 미즈노 다다쿠니(水野忠邦)을 등용하여 덴포(天保)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바쿠후는 앙등하는 물가를 막기 위하여 상인들의 동업 조합인 가부나카마(株仲間)을 폐지하고 도시 하층민들을 강제로 귀농시켜 농업 재건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덴포의 개혁 역시 상인과 다이묘들의 반발로 실패하고, 이후 바쿠후는 급속히 정치의 주도권을 일어 간 대신, 독자적으로 상공업과 무역을 장려하고 인재를 등용하는 등의 개혁을 추진해 온 각지의 웅번(雄藩)들이 정치의 표면에 부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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