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토 외국어 통역학원
  홈

   
 

banner
 

이름 : 관리자
제목 : 일본역사기행(45)- 쇄국에서 개국으로 [2005/05/25]



















왼쪽부터 이이나오스케, 이에요시


열번째 이야기 메이지 유신

쇄국에서 개국으로

도쿠가와 바쿠후는 중국과 조선을 제외한 다른 나라와는 외교 관계를 끊고 무역을 제한하는 등 엄격한 쇄국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인데, 첫째는 다이묘나 상인들이 독자적으로 외국 무역을 통해 경제력을 축적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중국이나 조선과는 물론 국교가 없어도 동남아 국가들과 무역은 지속하였다. 그러나 무역은 바쿠후의 무역 허가증인 슈인조(朱印狀)를 받은 자만이 할 수 있었다. 이 무역선을 슈인센(朱印船)이라고 하였다.
도쿠가와 바쿠후가 쇄국 정책을 편 두 번째 이유는 기독교의 확산 때문이었다. 일본의 기독교는 1549년 에스파니아의 선교사 프란시스코 사비에르가 사쓰마에 도착하면서 처음 전파되었는데, 16세기 후반에는 이미 신도 수가 20만 명을 넘었다. 바쿠후는 처음에는 기독교에 대하여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그러다 외래 종교의 유입에 대한 불교나 신토 등 기존
종교의 반발이 강해 바쿠후는 1612년 기독교 금지령을 내렸지만 아직 본격적인 탄압은 행해지지 않았다.
그러나 1637년 오늘날의 나가사키 현에 위치한 시마바라(島原)에서 기독교도가 중심이 된 반란이 일어나자 바쿠후는 기독교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는 한편 더욱 엄격한 쇄국 정책을 실시하게 되었다. 이때 기독교도를 색출하기 위해 실시된 것이 후미에(踏繪)로서 예수의 그림을 땅에 놓고 그것을 밟고 가게 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쇄국 정책 가운데서도 네덜란드에 대해서만은 교역을 허용했는데, 그것은 네덜란드가 신교 국가이자 신흥 상공업자들 즉 부르조아지들이 중심이 된 신생 독립국으로서 포교보다는 오직 상업적 이익에만 관심을 두었기 때문이었다. 네덜란드와의 교역에 중심이 된 곳은 바로 나가사키로 지금은 매립으로 육지의 일부가 되어 있는 데지마(出島)는 그 당시 네덜란드 상인들의 제한된 집단 거주 지역이었다.
네덜란드는 교역뿐만 아니라 서양의 학문과 지식을 일본에 전달하는 유일한 통로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일본인들은 서양인을 모두 화란인이라고 부르기도 했으며, 네덜란드를 통해 들어온 서양의 학문을 모두 난학(蘭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난학의 발전은 일본 근대화의 중요한 근원 가운데 하나가 된다.

일본이 쇄국 정책을 위협한 것은 산업 혁명 이후 아시아, 아프리카 등으로 세력을 확대해 가던 서양 열강의 진출이었다. 특히 1792년 러시아는 외교 사절을 보내 정식으로 국교를 요청하였고, 1800년대 들어와서는 영국과 미국 등의 선박이 여러 차례 일본의 근해로 들어와 충돌을 빗기도 하였다.
일본 개국의 결정적인 계기는 1953년 7월 미국의 동인도 함대 사령관 페리 제독이 이끄는 미국 군함 즉 구로후네(黑船)의 출현이었다. 미국은 태평양을 항해하는 포경선의 기항지로서 일본의 항구를 원하였다. 개항을 거부할 경우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미국의 강경한 태도에 위협을 느낀 바쿠후와 쇼군 이에요시는 국서는 접수하되 회답은 다음해에 하겠다고 하여 일단 곤경을 모면하였으나 다음해 1월 페리가 다시 7척의 군함을 이끌고 내항하자 더 이상 거부하지 못하고 1854년 3월 미일 화친 조약을 맺으니 이로써 200년 이상 지속되어 온 일본의 쇄국 정책은 종식되고 말았다.
이어서 1858년에는 바쿠후의 다이로(大老)인 이이 나오스케(井伊直弼)와 미국 대표 타운젠트 해리스 사이에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이 조인되었는데, 그 주요한 내용은 하코다테 등 5개의 항구를 개항하고 미국인에게 치외 법권을 허용한다는 것 등으로 전형적인 불평등 조약이었다. 20여년 후 일본이 조선과 강화도 조약을 맺을 때 모델이 된 것도 바로 이 미일 수호
통상 조약이었다. 미국측 대표 해리스는 그 후 주일 총영사가 되었는데, 이는 일본에 부임한 최초의 근대적인 외교관이라 할 수 잇다.

나가사키(長崎) 현은 쿠슈의 북서 끝에 위치하며, 5개의 반도와 많은 섬들로 구성되어 있다. 바다를 사이에 두고 중국 대륙과 한반도와 마주하고 있기 때문에, 오래 전부터 대륙과의 교통의 요충지였으며, 특히 17세기 이후는 포르투갈, 네덜란드 등과의 무역항도 설치되었으며 기독교 포교의 중심지였다. 971개나 되는 섬들이 현 면적의 거의 반을 차지하며, 시마바라 반도의 중앙에 위치한 운젠(雲仙) 화산은 일본에서 처음으로 국정 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나가사키 반도의 밑 부분에 위치하는 나가사키 시는 나가사키 만을 품은 자세로 산 중턱의 급사면까지 시가지가 발달된 항구 도시이다. 데지마(出島)는 나가사키 시가지의 남쪽 13,000m2 면적을 가진 부채형의 인공 섬으로 일본의 쇄국 시대에도 유일한 무역 상대국이었던 네덜란드인의 거류지로 17세기에 조성되었다. 19세기에 일본이 개국할 때까지 약 200년에 걸쳐서 네덜란드 상관이 설치되어 해외와의 사이에 유일한 창구였다. 19세기에 건조된 일본 최초의 크리스트교 신학교를 복구하여 1998년에 개관한 데지마 사료관에는 포르투갈을 비롯하여 영국, 네덜란드 등의 여러 나라와 무역의 상황이나 네덜란드 상관에서의 식생활이 재현되어 있다.
데지마 사료관의 남동에는 사방으로 청룡문, 백호문, 주작문, 현무문이 있으며 중국풍의 거리 모습이 가지런히 있는 중화가(中華街) 즉 차이나타운이 있다. 네덜란드와의 교역 이전에 나가사키는 중국, 조선 등과의 교역 중심지였다. 때문에 예전부터 중국인 등 외국인이 많이 거주했는데, 나가사키의 차이나타운은 고베, 요코하마와 함께 일본의 3대 차이나타운으로 불린다.
나가사키의 차이나타운은 또한 유명한 나가사키 잠퐁이 처음 만들어진 곳이기도 하다. 거리에는 지금도 많은 중화 요리점이 있으며, 또한 중국 관련 물품들을 판매하는 점포들이 늘어서 있다.
Copyright 1999-2020 Zeroboard / skin by ze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