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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관리자
제목 : 일본역사기행 (46) - 존왕 양이 [2005/05/25]
























사카모토 료마                                                             사이고 다카모리






















요시다 쇼인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


존왕 양이

도쿠가와 바쿠후가 그토록 무력하게 미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개항을 단행한 것은 당시의 바쿠후가 여러 가지 요인으로 인해 매우 허약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8대 쇼군 요시무네(吉宗) 이후 여러 쇼군들은 무능하거나 괴팍한 행동을 일삼는 등 바쿠후를 중흥시킬 만한 인물이 나타나지 못했다. 11대 쇼군 이에나리(家齊)는 히토쓰바시가 출신으로 초기에는 선정을 베풀었으나 후기에는 방만한 정치를 거듭하였고, 페리 내항 당시의 쇼군이었던 12대 이에요시(家慶)는 무능하여 정치를 모두 가신들에게 일임해 놓고 있었다. 여기에 겐로쿠 시대 이후 상인 계급의 성장은 무사 지배의 사회 질서를 동요시켰고, 계속된 기근과 재해로 민중의 생활은 매우 궁핍해졌다. 말하자면 이미 도쿠가와 바쿠후는 몰락의 길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300년을 유지되어 온 바쿠후가 개항 이후 불과 15년만에 붕괴되고 말았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굴욕적인 개항과 바쿠후의 무능력은 평소 바쿠후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던 다이묘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세키가하라 전투 이전에 도요토미 가문에 충성했다 하여 이에야스에 의해 외지로 쫓겨난 도자마다이묘들은 오랫동안 바쿠후에 대한 적대심을 품어 왔는데, 그들에게 개항은 바쿠후를 공격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이들은 무능한 바쿠후로서는 더 이상 일본을 유지할 수 없으므로 존왕 양이(尊王攘夷), 즉 천황을 중심으로 외국 오랑캐를 물리치자는 주장을 내세우기 시작하였는데, 조슈(長州)와 사쓰마(薩摩)는 여러 번들 중에서도 가장 강력하게 존왕 양이를 주장하였다.
존왕 양이파의 반발이 거세지자 바쿠후는 이이 나오스케를 중심으로 강력한 탄압책으로써 저항을 누르고자 하였다. 이것이 안세이 다이고쿠(安政大獄)로 이때 처형된 자가 100명을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바쿠후의 탄압은 오히려 존왕파들을 자극하여 다이로이던 이이 나오스케는 1860년 에도조의 사쿠라몬(櫻門)에서 존왕파의 사무라이들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이제 바쿠후와 존왕파의 대결은 피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데 이처럼 한편에서는 바쿠후와 존왕파들 간의 대립이 격화되어 가는 것과 동시에 존왕파 내에서는 그 중심 격인 조슈와 사쓰마 간의 갈등이 심각하였다. 처음부터 조슈와 사쓰마는 존왕 양이라는 동일한 구호를 내걸고 나서면서도 주도권을 놓고 서로 경쟁하고 있었는데, 바쿠후가 아직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존왕파 간의 분열 때문이었다.
이렇게 불화하던 양쪽이 연합하게 된 것은 외국 세력과의 전쟁이 결정적인 계기였다. 즉 영국 상인의 살해 사건으로 1883년 일어난 영국과 사쓰마의 사에이(薩英) 전쟁과 조슈군이 미국의 상선에 포격을 가한 데 대해 서양 4개국 연합 함대가 시모노세키를 공격한 사건으로 두 번은 서양 기술과 무력의 우수성을 인정하게 되고 개국의 불가피성을 인정하게 되었다.
따라서 존왕 양이라는 구호는 더 이상 명분이 없어지고 양쪽은 토바쿠(討幕) 즉 바쿠후 토벌을 새로운 구호로 내새우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양쪽의 갈등은 골깊은 것으로 남아 있었는데, 이때 등장한 것이 도사(土佐) 출신의 사카모토 료마였다.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는 조슈와 사쓰마 모두 바쿠후 토벌에 공동의 목적이 있음을 상기시키고 두 번의 화해를 중재하였다. 이렇게 해서 사쓰마 대표인 사이고 다카모리와 조슈 대표인 기도 다카요시 사이에 비밀 동맹이 맺어지는데 이를 삿쵸 동맹이라고 한다. 삿쵸 동맹은 조슈를 공격해 온 바쿠후군을 격퇴시킴으로써 비로소 군사적으로 우위에 서게 되고, 일개 번인 조슈에 패배한 바쿠후의 권위는 크게 손상되었다. 이제 바쿠후와 삿쵸 동맹을 중심으로 한 존왕파 간의 전면전은 피할 수 없어 보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같은 해 12월 14대 쇼군 이에모치(家茂)가 죽고 요시노부(慶喜)가 15대 쇼군이 된 것과 같은 시기에 고묘(孝明) 천황이 죽고 메이지(明治) 천황이 즉위하게 되었다.
삿쵸 동맹을 이끈 도사 번은 삿쵸 동맹과 바쿠후 사이에서 다시 중재에 나서 전면전 대신 쇼군이 천황에게 권력을 이양하고 바쿠후를 천황 밑에 정식으로 편입시킴으로써 고부갓타이(公武合體) 즉 두 개의 조정을 하나로 합칠 것을 제안하였다. 이미 대세를 거스를 수 없었던 요시노부는 이 제안을 받아들여 1867년 천황에게 권력을 반환하니 이것이 다이세이호칸(大政奉還)이다. 이에 메이지 천황은 바쿠후를 폐쇄하고 쇼군이라는 직위를 없애고 직접 친정할 것을 선언하였다. 이로써 260여년을 이어온 도쿠가와 바쿠후는 정식으로 문을 닫게 되었고 가마쿠라 바쿠후 이후 700여년을 이어온 무사의 정권도 막을 내리게 되었다.

사카모토 료마(坂本龍馬)는 지금도 일본의 역사에서 가장 뛰어난 정치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도사 번 출신으로 특히 협상과 중재에 능하여 삿쵸 동맹을 이끌어 내었고, 신정부와 바쿠후 간의 협상을 중재하기도 하였다. 또한 상재에도 능하여 일본 역사상 최초의 현대식 상사이라고 할 수 있는 해원대(海援隊)을 조직하여 해운과 무역 등으로 많은 재산을 모으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카모토 료마의 가장 탁월한 능력은 아마 세계의 흐름과 미래를 내다보는 안목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아직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기 전 너나 할 것 없이 장검을 치고 다니던 시절 료마는 거리를 가다가 당대의 검술 명인인 친구를 만났다고 한다. 장검을 차고 있는 친구에게 료마는 "이보게, 이제는 세상이 바뀌었다네. 장검을 뽑던 시대는 가고 이제는 권총으로 대결해야 하는 시대가 왔다네" 하며 가슴에 품은 권총을 보여 주었다. 이에 감명받은 친구는 그 후 얼마 지나 료마를 찾아와 자랑스럽게 권총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료마는 "이제는 권총의 시대도 끝났네. 이제는 이것으로 승부를 걸어야 하네" 라고 말하며 가슴 속에서 작은 국제 법전 한 권을 꺼내 보이더라는 것이다. 사카모토 료마의 묘는 교토 고다이지 근처에 있다.

존왕파의 중심세력이었던 조슈(長州)는 오늘날의 야마구치(山口) 현이다. 야마구치 현은 혼슈의 가장 서부에 위치하고 있어서 혼슈와 쿠슈를 잇는 교통 요충지이며, 예로부터 한반도와의 교류가 행해져 온 곳이다. 도자기의 고장으로 유명한 하기(荻)는 야마구치 현의 동해 연안 중앙부에 위치하는데,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인 삼각주에 만들어진 성곽 도시이다. 도요토미 시대의 다섯 다이로 가운데 한 명이기도 한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가 지금의 하기 시 북서부에 있는 시즈키 언덕에 하기조를 축성한 야마구치 현의 중심 도시로 발전하였다.
모리 데루모토는 세키가하라 전투 때 이시다의 서군에 가담했다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패한 후 혼슈의 끝인 이곳으로 쫓겨오게 되었다. 이 때문에 하기를 중심으로 한 당시의 조슈는 도쿠가와 바쿠후에 대한 불만이 높았으며, 이것이 그 후 조슈가 바쿠후 타도에 나서게 된 주요한 이유가 되었다. 지금은 하기조의 성터 가운데 수로와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다.

하기에는 에도 시대 말기의 철학자이자 교육자였던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의 저택이 있다.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나 10세 때 이미 번주 앞에서 군사학에 대해 강의했다는 요시다 쇼인은 29세의 나이에 바쿠후에 대한 반역죄로 처형당했지만 다카스키 신사쿠(高杉晉作),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뒷날 메이지 정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들을 길러냄으로써 사실상 메이지 유신의 정신적 지주로 불리고 있다. 그는 특히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와 더불어 정한론(征韓論)을 처음 주장한 인물 가운데 하나이다. 쇼인진자와 기념관은 그를 기린 곳이다.

<사진 - 요시다 쇼인>

조슈와 함께 존왕파의 중심이 된 사쓰마(薩摩)는 오늘날 쿠슈 최남단에 위치한 가고시마(鹿兒島) 현이다. 사쓰마는 역시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이시다의 서군에 가담했던 시마쓰 요시히로(島津義弘)의 영지이다. 전국 시대 이전부터 쿠슈의 강력한 다이묘였던 시마쓰씨의 원래 영지는 오늘의 나가사키 현에 가까운 쿠슈 북부 지역이었으나,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이에야스의 명에 의해 오늘의 가고시마로 쫓겨오게 된 것이다. 1660년에 시마즈씨의 별장으로 지어진 이소테이엔(磯庭園)이 아직 남아 있는데, 활화산인 사쿠라지마(櫻島)와 긴코(錦江) 만을 배경으로 한 서원 양식의 저택으로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는 사쓰마 출신의 무사로 삿쵸 동맹 당시 사쓰마의 대표였으며, 정부군과 바쿠후군이 격돌한 보신 전쟁에서는 정부군의 대표로서 쇼군 요시노부의 퇴임을 협상한 인물이다. 이 때문에 메이지 유신 이후 정부의 실력자로서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이 주장한 정한론이 정부내의 관료파들에 의해 배격되자, 그는 정부를 타도하기로 작정하고 군사를 모아 정부에 대한 반란을 일으켰다. 이것이 1877년의 세이난(西南) 전쟁이다.
다카모리는 전통적인 무사의 기질이 강했던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바쿠후를 몰락시키는 데에는 적극적이었으나 무사 지배의 사회 질서 자체를 전복시키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그가 주장한 정한론은 단순히 조선을 침략한다는 것 외에도 그것을 통해 무사의 지위를 다시 확립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오쿠보 도시미치나 이토 히로부미 등 정부 내의 관료파들은 조선 침략에는 동의했으나 그 시기가 너무 빠르다고 주장했는데, 이들의 속셈 역시 무사 계급이 다시 대두하는 것을 막고자 한 것이었다. 신정부의 개혁으로 신분적 특권을 빼앗기게 된 사족(士族)들 즉 무사 계급 출신의 불만 세력들을 모은 사이고 다카모리는 1871년 구마모토조의 정부군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구마모토조는 천혜의 요새인 데다가 신병기로 무장한 정부군의 저항을 뚫지 못해 반란군은 궤멸되고, 다카모리는 도망쳐 사쓰마 즉 오늘의 가고시마에 있는 시로야마(城山)의 한 동굴에 은신하다가 정부군이 추격해 오자 자결하였다. 사이고 다카모리가 자결한 동굴이 있는 시로야마는 해발 109m로 그다지 높지는 않으나 가고시마를 대표하는 산으로 사이고 다카모리 동굴 이외에도 많은 진자와 사찰들이 있다.

신정부에 저항하여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에 사이고 다카모리는 신정부 수립의 일등 공신임에도 불구하고 오랫동안 역적으로 낙인찍혔으나 그 후 복권되어 지금은 그의 동상이 보신 전쟁 당시 정부군이 바쿠후군의 마지막 저항을 물리친 우에노코엔(上野公園) 입구에 서 있다.

신정부를 주도한 인물이었던 오쿠보 도시미치(大久保利通)은 사이고 다카모리와 같은 사쓰마 출신으로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절친한 친구였을 뿐 아니라 바쿠후를 무너뜨리는 데 기여한 동지이기도 했다. 그러나 마지막 사무라이라고 불리는 다카모리가 전통적인 무사 기질의 인물이었던 데 반해, 메이지 유신 직후 신정부의 대표로 이토 히로부미 등과 함께 미국과 유럽을 견학한 바 있는 도시미치는 관료 지배의 근대적 정부를 지향한 인물이었다. 언젠가 다카모리는 도시미치와 자신을 비교하여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일 한 채의 집을 짓는 것에 비유한다면 나는 설계를 하고 토대를 만들고 골조를 세우는 것에서는 그를 능가한다. 그러나 그 집의 내부를 장식하고 꾸미는 재능은 도저히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 두 사람의 대립은 물론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며, 당시 일본 사회의 진로를 둘러싼 두 세력 간의 갈등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 갈등과 대립이 폭발한 것이 바로 세이난 전쟁이다.
메이지 유신 이후 도시미츠는 신정부의 핵심 인물로 조세 제도의 개혁, 식산 흥업 정책의 추진, 사족 반란의 진압 등을 주도함으로써 자신의 능력을 크게 발휘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오쿠보 독재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개혁 소외 세력들의 불만을 사기도 했다. 이 때문에 세이난 전쟁에서 패한 다카모리가 자결한 지 1년 후 도시미츠도 무사 출신의 자객에게 암살 당하여 생을 마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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