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토 외국어 통역학원
  홈

   
 

banner
 

이름 : 관리자
제목 : 일본역사기행... (34) 가이의 호랑이와 에치고의 용 [2004/07/21]
















좌)다케다 신겐(武田信玄)                                             우)우에스기 겐신

여덟 번째 이야기 천하를 놓고 겨루다

가이의 호랑이와 에치고의 용

무로마치 바쿠후의 몰락에서 후일 에도에 도쿠가와 바쿠후가 설 때까지의 기간을 흔히 전국(戰國) 시대라고 부른다. 이 시대의 중심 인물들은 물론 스스로의 힘으로 지역의 권력을 잡은 센고쿠다이묘(戰國大名)들이었다. 그런데 이 센고쿠다이묘들은 중앙에서 임명된 슈고다이묘(守護大名)들과는 달리 대부분 지방의 토착 무사 출신으로서 이들의 권력 기반은 그 지방에 국한되어 있었고 그들이 지향한 것도 전국적인 패권보다는 지역에서의 권력 유지인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서도 우월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인근의 다이묘들을 정벌하여 전국적인 패권을 노린 이들이 있었으니, 간토의 이세 나가우지, 에치고의 우에스기 겐신, 가이의 다케다 신켄, 스루가의 이마가와 요시모토, 오와리의 오다 노부나가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들 가운데서 일본 통일의 초석을 만든 것은 오다 노부나가이지만, 전국 시대 최고의 무장으로 꼽히는 것은 가이의 호랑이라 불렸던 다케다 신겐과 그의 필생의 숙적이었던 우에스기 겐신이었다.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은 오늘날의 야마나시(山梨) 현인 가이(甲斐)의 다이묘인 다케다 노부토라(武田信虎)의 장자로 태어났다. 다케다 집안의 시조는 미나모토노요시미쓰(源義光)인데, 히에이잔의 미이데라(三井寺)에 모셔진 신라묘진(新羅明神) 앞에서 관례를 치른 이후 신라사부로(新羅三郞)으로 이름을 고쳤다는 이야기로 유명한 인물이다.
다케다 신겐은 13세 때 처음 전투에 출전했고 16세 때에는 단 300의 군사로 아버지 노부토라도 공략하지 못한 성을 점령했다고 할 만큼 지략과 전법의 천재였다. 노부토라는 폭정을 일삼아 가신과 백성들의 신망을 잃고 있었는데, 신겐은 그런 부친에게 반기를 들어 부친을 영지에서 내몰고 스스로 다이묘가 되었다. 신겐이 부친에게 반기를 든 것은 자신 대신 아우인 노부시게(信繁)를 후계자로 지명하려 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다케다 신겐의 이름을 드높인 것은 그의 기마 부대였다. 신겐의 기마 부대는 {손자병법(孫子兵法)} [군쟁편]의 "風林火山" 즉 빠르기가 바람과 같으며, 은밀하기는 숲과 같고, 불처럼 순식간에 적진을 덮치며 산과 같이 듬직하게 버틴다는 전술을 따라 만들어진 것이라고 한다. 신켄의 군사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용맹하여 미가와 병사 하나가 오와리 병사 3명을 상대하고 가이의 병사는 미가와 병사 3명과 맞먹는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미가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영지이고, 오와리는 오다 노부나가의 영지이다.
전성 시절 신겐의 영지는 가이와 시나노에서 스루가, 미카와, 그리고 하다의 일부에까지 이르렀다. 이 당시 오다 노부나가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아와리와 미카와의 작은 다이묘에 불과했다. 이처럼 강대한 전력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신겐이 전국의 패권을 장악할 수 없었던 것은 우에스기 겐신이라는 필생의 숙적이 그를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이다.
가이의 호랑이 다케다 신겐과 비교하여 에치고의 용이라 불렸던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은 오늘날의 니이가타(新渴) 현인 에치고(越後)의 슈고다이묘 집안에서 태어났다. 원래 이름은 나가오 가게도라(長尾景虎)였으나 후일 조정으로부터 간토의 간레이(管領) 직을 부여받으면서 우에스기 겐신으로 개명하였다. 부친을 몰아내고 다이묘가 된 신겐처럼 겐신도 슈고 임명을 둘러싸고 가신들과 갈등을 빚은 친형 하루가게(春景)를 몰아내고 다이묘가 되었는데, 이때 그의 나이는 불과 19세였다. 당시 겐신의 영지는 다케다, 이마가와, 호죠 가문의 삼국 동맹에 포위된 형국이어서 이들로부터 크게 압박당하였다.
1553년 겐신은 시나노(信濃) 일대의 패권을 놓고 다케다 신겐과 첫 번째 가와나카지마(川中島) 전투를 벌이는데, 이 후 두 사람은 1564년까지 13년에 걸쳐 무려 다섯 번이나 가와나카지마에서 전투를 벌인다. 그 중에서도 양쪽의 군사가 가장 격렬하게 충돌한 것은 1561년의 전투인데, 이 전투에서 신겐의 군영을 기습한 겐신이 신겐이 타고 있던 배로 뛰어들어 칼로 신겐을 내리치자 신겐이 급한 나머지 지휘용 부채를 들어 칼을 막았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가와나카지마는 오늘날의 나가노(長野) 시 근처이다.
다케다 신겐과 우에스기 겐신은 두 사람 모두 전국 시대 최고의 명장이자 필생의 숙적이었을 뿐 아니라 대조적인 전술로도 유명하다. 신겐은 뛰어난 무용과 지휘력으로 지는 전투도 이기게 만든다는 칭송을 받을 만큼 적극적인 전술을 사용하였다. 오다 노부나가조차도 신겐과는 직접 충돌을 피할 정도였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 역시 훗날 자신의 전술은 신겐에게서 배웠다고 인정하였을 정도이다. 반면 겐신은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지난다고 할 만큼 신중한 성격으로 반드시 이길 준비가 되었을 때에만 전투에 나섰다고 한다. 특히 겐신은 스스로 비사문천(毘沙門天)의 화신이라고 자칭하며 전투 전에는 반드시 기도를 올리고 출전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겐신을 신이라 믿은 그의 부하들은 충성심이 대단하여 일단 전투에 나서면 죽음을 두려워 않고 싸웠다고 한다. 가와나카지마 전투의 경우를 보더라도 겐신은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신겐의 군사를 기습하여 신겐을 거의 패배 직전까지 몰고 갔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보면 그러한 겐신을 맞아 끝내 전세를 뒤집었으니 신겐이야말로 전술의 천재라는 평가도 과장된 것만은 아니라고 하겠다.
이처럼 신겐과 겐신이 치열하게 대치하고 있는 동안 오와리에서 세력을 확장한 오다 노부나가는 스루가(駿河)의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를 격파하고 교토로 진격하였다. 미카와의 작은 다이묘 집안 출신이었던 이에야스도 어린 시절 이마가와 집안에 인질 생활을 했을 만큼 당시 요시모토의 세력은 매우 강대했다. 그러나 군사 수에서 압도적인 우위에 있었으면서도 요시모토는 오케하자마(桶狹間) 전투에서 오다군에게 어이없는 패배를 당하고 전사하였다. 당시 요시모토의 군사는 25,000명인 데 반해 노부나가의 군사는 불과 3,000명이었다고 한다. 오케하자마는 지금의 아이치(愛知) 현 나고야 시 남쪽에 있다. 오케하자마 전투에서 노부나가가 대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비오는 밤에 기습을 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아무튼 이 전투의 승리로 노부나가는 다른 무장들보다 먼저 교토에 입성할 수 있었고 이 때부터 전국 시대의 패권은 급속히 노부나가에게로 기울고 만다.
교토로 진격한 노부나가가 남도 북령의 승병 세력과 대치하고 있는 틈을 타 다케다 신겐도 교토로 진격하였다. 이 때 신겐의 군사를 가로막고 나선 것은 도쿠가와군이었는데, 미카다가하라(三方原) 전투에서 신겐은 도쿠가와군을 크게 물리쳤고 이에야스는 겨우 목숨을 부지하여 도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교토 입성의 마지막 교두보가 될 전투를 앞두고 1573년 신겐은 병영에서 갑자기 급사하고 만다. 신겐의 사인에 대해서는 여러 이야기가 있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는데, 일설에는 함락될 위기에 처한 도쿠가와군이 피리로 기묘한 음악을 연주하자 신겐이 성벽 아래서 그 소리를 듣다가 저격병의 총에 맞았다고 한다.
아무튼 신겐은 두 가지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는데, 그것은 자신의 죽음을 3년 동안 알리지 말 것과 적이 공격해 오더라도 영지 밖으로 군사를 움직이지 말라는 것이었다. 이 유언에 따라 다케다 집안에서는 신겐과 닮은 부하를 신겐인 것처럼 가장시켜 그의 죽음을 속이고자 하였다. 이것이 구로자와 아키라(黑澤明) 감독의 영화로도 유명한 가케무샤(影無者)이다.
그러나 신겐의 죽음을 탐지한 오다와 도쿠가와 연합군이 진격해 오자 신겐의 아들인 가쓰요리(勝賴)는 부친의 유언을 어기고 신겐이 자랑하던 정예군 25,000명의 기마 부대를 이끌고 영지 밖으로 출정하였다. 이 전투에서 결정적인 참패를 당함으로써 다케다 가문은 급속히 몰락하고 말았다. 한 때 천하 제일의 위력을 자랑하던 다케다군의 기마 부대를 전멸시킨 것은 바로 오다군의 조총 부대였다.
만약 우에스기 겐신이라는 장애물이 없었다면 천하의 패권은 오다 노부나가가 아니라 다케다 신겐의 것이 되었을런지도 모른다. 한편 신겐과 달리 겐신은 자신의 영지를 지키는 것 이상의 포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흔히 이야기되지만 실은 겐신 역시 신겐이라는 강대한 적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포부를 펼쳐 보지 못했던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신겐이 죽고 다케다 집안이 몰락함에 따라 쉽게 시나노의 패권을 장악한 겐신은 드디어 교토를 향하여 출정하기로 한다. 그러나 1578년 출정을 하루 앞두고 겐신은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사망하는데, 일설에는 지나치게 술을 좋아한 겐신이어서 과음이 죽음의 원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Copyright 1999-2022 Zeroboard / skin by zero